사랑을 말하라면 - 안도섭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 차례 -- 제1부 너는 한 별로 태어나 제2부 우리는 아무 말 없어도 제3부 하나의 만남 제4부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나직이 고백해 다오 제5부 우리 한마음 되리 ------------------------------------------ 제1부 너는 한 별로 태어나 ------------------------------------------ -만남은 곧 떠남이라고 -너는 한 별로 태어나 -미모사 -릴라꽃에게 -너는 풀잎 -낙엽지는 날 -동해바다 -어느 포구 -비너스 -흑장미 -그대 앞에선 -비돋는 여름밤 -포구의 여인 -폭포 아래서 -해안선 -그대 떠나기에 -사랑은 -가을비 -항구는 -보석 -바다의 여인 -가을의 벤치에서 -첫나들이 -하나의 만남을 위하여 -포항 나그네 -낙엽이 지면 ⊙ 만남은 곧 떠남이라고 만남은 곧 떠남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봄 오면 이내 가을이 온다고 시인들은 곧잘 죽음에 떠는 갈잎을 노래한다 허나 나는 대지의 푸른 봄을 노래하련다 시간은 누리 위 달리고 황야를 넘어 쓸쓸한 무덤에 이르네 그 떠남, 그 이별을 바람에게나 물어보오! 만남은 곧 떠남이라고 어느 누가 말했던가 꽃피면 이내 가을비 뿌린다고 ⊙ 너는 한 별로 태어나 너는 한 별로 태어나 어딘 듯 숨어들지만 한 줄기 찾아오는 빛이여 나는 찻잔을 들거나 빈 찻잔 놓고 무시로 그려보는 별 하나 너는 그리도 먼 나라 너는 그리도 아득한 이름이기에 별이라 이르느냐 네 혼 네 벌거벗은 육체는 목말라 갈구하는 목숨의 샘 티없는 하늘 구김없이 나래 펴는 새의 깃 위에도 너는 있고 나의 두 눈 안에도 너는 한 별로 태어나 이밤 샘 깊이 나를 젖게 하누나 ⊙ 미모사 바람만 스쳐도 움찔 잎을 오므리는 너는 타고 난 감성 탓일 게다 푸나무의 시인 숨긴 정열 누르다 누르다 지진 이는 날 한 번 터지리라 울며불며 뒹굴며 눈을 감고 혼절하는 그 전율 스스로를 어쩌지 못해 밑뿌리 흔들리는 이 대낮에도 너는 꿈을 꾸는 몽유시인 ⊙ 릴라꽃에게 너는 릴라꽃 은은한 향으로 번져 이 아침 그윽하다 자정향(紫丁香) 꽃샘 이는 날 창가 어리는 네 갈래 진 보랏빛 망울이여 마음 하나에 하롱대는 눈짓 술인 양 익어가는 밀어들 봄바람 살랑이면 그 향기 뿌린 듯 그림자 아롱이는 실루엣 순결의 꽃말 고와라 하루 부푸는 글라스 위에 이 가슴 적시노니 ⊙ 너는 풀잎 풀잎은 가슴에 구슬 달고 황홀함으로 무지개 낳는다 님아 님아 나직이 부르던 이름 꿈 같은 선연함으로 아침 해 그림으로 필 때 풀잎은 소르르소르르 몸을 떨며 이슬 방울 내린다 ⊙ 낙엽지는날 시나브로 낙엽지는 날 타는 놀 들면 우리는 빈 벤치 마주 앉아요 흰바람 머리칼 날리고 을알이 꾀벗는 나뭇가지 그 외로움의 끝자리로 어머니 마음같이 포근한 대지의 숲 그 언저리 그리움의 오솔길로 내 가진 것 다 털어버리고 네 가진 것 다 털어버리고 오룻이 빈 마음되어 첫눈이 내리기 전 노란 은행잎 흩날리면 우리는 나그네되어 어느 먼 길 떠나가요 ⊙ 동해바다 구름 낀 동해바다는 한 폭의 수묵화 둘이서 모래톱 걸으면 꿈길같은 동화의 나라 철썩 발끝에 파도는 자자들고 너와 나 손 그러잡고 가이없이 걸을까 반도의 동녘 끝 토끼 꼬리 같은 해안선 따라 가면 검은 색칠을 하는 가로수 갈매기도 울지 않는 포구의 별밤 우리는 한때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보는 저 멀리 어화 불빛이 곱다 ⊙ 어느 포구 이 포구는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논 도시 속살 젖는 언어로 파도는 다가와 바다의 향수 뿌리고 가면 귀를 세운 소라, 나는 비로소 바다의 육체 앞에 눈 뜨고 넘치는 낭만, 사랑만이 싱그러운 포구의 은빛나는 하루여 ⊙ 비너스 하늘 샘 내려와 앉은 육체의 빛 두 젖꼭지 포도알처럼 무르익고 학의 목, 배고픈 허리는 희랍의 비너스인가 대낮의 실신자처럼 두 눈 감은 얼굴 등 돌린 허리께는 외로운 선으로 둥근 원 휘돌아 조각이 된다 ⊙ 흑장미 신비의 검은 빛인가 자궁 속 꿈틀은 흑장미 한 송이 눈부신 태양아래 꿈의 정령인 듯 너는 그윽히 벙글어 권태로운 여름에도 파도치는 날개 짓으로 멀리 바다 거품 손짓하고 정녕 너 희디희다 못해 타버린 혼백인가, 육신의 속심지인가 간밤 애달픈 꽃, 아침에 검붉은 넋 이글거리는 오, 흑장미 한 송이 ⊙ 그대 앞에선 그대 앞에선 나의 대꼬챙이 독설도 가위눌린 듯 시들해지네 그대 앞에선 나의 번득이는 기지도 날 넘은 듯 무디어지고 나를 침묵케 만드는 그대여, ――나는 가슴 앓는 벙어리 그대 앞에선 한 잔 카페인도 그만 재스민에 사위는 둣 싶구려 ⊙ 비돋는 여름밤 비돋는 여름밤을 비오롱은 운다 검은 비 젖어 파초잎은 긴 치마 후들거릴까 이밤 별은 숨어 그리움은 먼데 소라귀 파고드는 비발디의 선율 성긴 빗줄기 게으른 G단조로 창을 두드리고 온다 ⊙ 포구의 여인 그대 새벽눈은 사랑 감춘 미소 그대 입술은 수선화 닮은 침묵이 좋다 이브 데이의 누드보다 우유빛 살결은 선이 가늘고 바다 숨결인가 나직이, 때론 거칠게 그대 느끼는 생명의 소리 나의 눈망울에는 수채화 같은 파도 그 포구 여인의 꿈이 어린다 ⊙ 폭포 아래서 천길 낭떠러지 하얀 생명으로 다가오는 이시린 가슴아 퐁당 못 속에 별이 지고 굽이굽이 해가 젖는 물보라 마음은 그윽하나 쏜살같이 달리는 너 무엇에 그리 쏠리는 이름이기 무지개 뜬 구름 속 혼도 넋도 곤두박질쳐 내리는 이승길 한달음인가 한여름에도 한기 서려 산산이 알몸 부서져 내리는 너 신비의 여인아 ⊙ 해안선 지도에서는 검은 땅을 육지, 푸른 파도를 바다라 이른다 뭍길과 평행으로 달리는 수채화 물감 같은 그 굽은 해안선 월송정 지나 죽변항 노래로만 듣던 팔십 리 포구가 눈앞에 있다 삼척, 동해, 강릉 이르면 흰 모래톱 뻗은 경포대 앞바다 수평선 맞닿은 원색의 파도춤 그와 나는 새까만 별밤 모래 사장에 누워도 보고 장 콕토의 소라의 귀를 기울여도 본다 ⊙ 그대 떠나기에 그대 떠나기에 이리 비인 가슴 잎 다 흩날린 나뭇가지 되는가 말없이 거닐던 거리 뒹구는 가랑잎 도심의 가로수 아래 흩날렸지 잠시 철새로 왔다 철새로 떠나는 그대의 실루엣 부등켜 안고 으스스 들국화 여위는 자리 나는 바람피리 불며 불며 그대 떠나기에 이리 파리한 손 잎 잎 떨군 실가지 휘청이는가 ⊙ 사랑은 무엇에나 비길까 질화로에 툭툭 튀는 아람의 앉은뱅이춤 아니면 바다 한가운데 시뻘겋게 잉태하는 해의 꿈틀임인가 사랑은 네모난 귀가 아니라 둥근 그림 호수 위 보름달 미소 오직 한곳으로 내닫는 활시위 청대도 시새우는 그 이름 곧디곧은 넋인가 사랑이 시들면 네 가슴 재가 묻어나고 하루의 꿈 풀잎에 나뒹구는 저녁 이슬 되리니 ⊙ 가을비 봄에는 있으마고 실비 오더니 가을엔 간다고 갈비 내리네 수양버들 휘늘인 오솔길 거닐면 내 마음 유리에 이슬 맺히고 그대 값진 구슬이더니 인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별똥… 아침녘 갈비 젖어 이리저리 홀로 숲속을 떠도네 ⊙ 항구는 항구는 이 뱃머리 푸른 물감 출렁이고 항구는 그 새벽눈 소로시 미소 머금는가 항구는 항구는 바람 항구는 항구는 물결 항구는 갈매기 우는 창이 좋다 비젖는 창변 네 발자국 소리 뱃고동인 양 가슴 설레면 항구는 저 해돋이 바다 가운데 그림으로 뜨고 ⊙ 보석 보속은 얼어붙은 꽃 여느 꽃을 닮은 가짜꽃 제 아무리 그 빛깔 영롱하다 해도 눈길처럼 이글거리지 못하고 그 황돌함 곧잘 여인 의 마음 움직이지만 사나이의 심혼 흔들지는 못한다 보석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화려하나 한낱 돌멩이일 뿐 시들지 않는 꽃이라지만 보석은 이미 피가 마른 미이라 미이라꽃 ⊙ 바다의 여인 연초록 바다 나는 이 포구에 와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종일 햇볕에 멱감던 가로수 그 머리 위로 남십자성(南十字星) 뜨면 바다속 어화(漁火) 깜박일 때 너와 거닐던 해안선을 이제는 발길 돌려야 하느니 깜깜 색칠하는 먹밤 벽과의 밀어인 듯 너는 길들인 파도의 숨결로 노크하고 창에 걸린 아침해 녹색바람 속삭일 때 너는 수채화 같은 육체 풀어헤치고 온다 ⊙ 가을의 벤치에서 시나브로 낙엽이 지네 계절 잃은 빈터 마른 잎 예저기 흩날리고 지난날 달콤했던 입술 그 입술 닮은 것들 내 앉은 발치 뒹굴면 그림자도 어리지 않는 해떠난 자리 재식은 땅 사위는 이름 이름들 그 이름을 묻둣 내 가슴에 지고 있네 ⊙ 첫나들이 우리의 첫나들이는 어디로 할까 참나무, 물푸레나무, 이깔나무 밋밋한 숲을 지나 질펀한 들녁 목양신(牧羊神) 조으는 한낮의 호수쯤으로… 아니면 꿈꾸듯 해협 열리는 나부끼는 깃발의 항만 어느 백사장쯤으로… 우리 가슴과 가슴 손과 손 그러잡고 모래밭에 흰 발자국 남기면 밤하늘의 오리온 성좌 머리끝 휘황한 북두칠성 값진 보석알 담뿍 아로새기리니 비둘기 한쌍 품에 안고 새벽 안개 헤치는 우리의 첫나들이는 어디로 할까 ⊙ 하나의 만남을 위하여 지난 꿈이 새 꿈이 되어 오는가 그대의 손길 그 손길 위에 라일락 향기 같은 눈짓 어리고 하나의 만남은 순정처럼 설레이는 파도 달려오는 항구의 깃발 깃발은 사랑과 같이 열렬하고 깃발은 믿음과 같이 펄럭이는 아침의 푸른 언어 열리는 창 고즈너기 부르는 그대의 웃음이기에 ⊙ 포항 나그네 베레모 쓰고 허름한 손가방 든 포항 나그네 옛날에 알던 사람 찾지도 않고 해안선을 혼자 거닌다 해뜨는 동해 눈부신 날의 태동이여, 춤추는 파도 나래 접어 오면 모든 것 해풍에 날려 보내고 모래 사장 거닐어 보지만 지난날의 자취는 간데 없다 이 항구 낯선 거리 가을 속 떠나가는 포항 나그네 ⊙ 낙엽이 지면 낙엽이 지면 인적 끊인 노을길 그대와 나 발길 옮겨야 하네 낙엽이 지면 사윈 세월의 벼랑길 그대와 나 한 발자국 내려서야 하네 수레 속 휘도는 시간의 나래죽지여 잿빛 바다로 돛단배 떠나듯 그대와 나 애타는 사연 두고 청춘의 이즈른 꿈 두고 소슬히 바람부는 날 떠나야 하네 지금은 앙상한 가지 벋어 지금은 꾀벗은 알몸되어 머리끝 휘감기는 저기 꿈자락만 꿈자락만 감도네 ---------------------------------------------- 제 2 부 우리는 아무 말 없어도 ---------------------------------------------- -우리는 열렬히 사랑했네 -나의 이브 -하나만의 비밀 -불나비 -가을밤의 실루엣 -장미 한 송이 -백목련 -그리움 1 -그리움 2 -사랑법 -별 이야기 -우리의 포옹은 -차를 마시며 -한밤의 노래 -이브 이후 -우리는 아무 말 없어도 -어느 해의 연가 -그 목소리 -흰 목화송이 -사랑을 말하라면 -아침의 풍속 -이 전율 -아카시아 숲길 -시편 하나 -우리들의 나라는 -사미인곡 -얼굴 ⊙ 우리는 열렬히 사랑했네 우리는 열렬히 사랑했네 간밤의 꿈속에 그 무구의 손 나는 혹했네, 한눈에 매료되었네 앵도알 같은 것 똑똑 여물었네 어쩌면 좋아, 그 드맑은 눈 나는 보고파 자나깨나 눈을 비볐네 마음은 덧없이 부풀고 홍건히 젖어드는 그 순정의 시 나는 음미했네, 가슴 두근거렸네 우리는 마침내 정다이 악수했네 밤마다 별빛 모두는 그 눈빛 나는 취했네, 화주 마시듯 아주 도취했네 ⊙ 나의 이브 그대는 나의 이브, 펄펄 눈송이 나리네 그대는 나의 샘물, 마르지 않는 영혼이라네 나의 육체는 타는 정열로 불태우고자 모닥불 앞에 서면 나의 이브여, 베일일랑 거두어 오려므나 좀더 가차이 그대 숨결 장미빛 불붙는 사랑을… 해 기울기 전 저 노을 재되기 전에 ⊙ 하나만의 비밀 아무에게도 일러준 일 없는 하나만의 비밀 그 열쇠 선사하리니 그대 미소 속에 어리는 하나만의 꽃봉오리 하늘 닿을 듯 생명이 펴나네 무슨 빛깔일까 하나만의 사랑 끝없는 고행끝에 열리는 길은… 샛별 반짝이는 하나만의 예지 그 눈뜨는 창으로 달려 가오니 ⊙ 불나비 그 얼마나 불 데인 정열이랴 한 번 사랑과의 입맞춤으로 붉게 타올랐네 불나비 죽음도 오히려 마다 않고 한마음 내던진 꽃의 화신이여 온몸 사르어도 꽃잎 흐트려도 스러지지 않는 영혼 별에게로 옮았나 그 황홀 해에게로 옮겼나 그 장엄 불나비, 불나비, 불나비 그 얼마나 화끈한 찰나이랴 ⊙ 가을밤의 실루엣 찬비, 가을 나무의 맨몸 적시고 후줄근 맨살 드런낸 수은등 불빛 희미한 그림자 어른거리면 마치 인생의 그것처럼 저마다 한 권의 소설이 되는 생애― 그 슬프고도 아득한 날의 갈대 꽃대궁 꽃이 지는 아픔의 자리 열매 맺듯 나목 가지마다 이슬 먹은 별 한 폭 스크린처럼 잇대인 가로수 행렬되어 오고 수은등 불빛 별똥되어 날아오오 ⊙ 장미 한 송이 사랑하기 때문에 꺽지 않는 장미 한 송이 가슴에 맺혔네 티없는 숨결 뛰노는 그 심장꽃 붉은 입술인 양 미소 머금으면 내 마음에 어리는 무지개 비록 말은 없어도 그 꽃송이 이 밤의 정수리에 꽂고 사랑하기 때문에 꺽지 않던 장미 한 송이 가슴에 피었네 ⊙ 백목련 저 꿈 넘실대는 구름 끝, 화택(火宅)의 이웃 그대는 오네 내 연인의 흰 목덜미보다 고운 살결 그대 웃네 이른봄 환영만이 남은 영혼의 자리 그대 떠나가네 ⊙ 그리움 1 흰 물새 떠도는 호수를 그리우듯이 그대 보고프면 난 책장 속에 묻혀 버릴래요 난 침묵 속에 잠겨 버릴래요 흰눈 내리는 새벽녘 한소식 반기듯이 그대 보고프면 난 꿈속에 날아 갈래요 난 잠무덤 속 파묻힐래요 ⊙ 그리움 2 여름 하늘은 풍덩 내 마음을 빠지게 한다 깊은 잠처럼 나를 잊게 하는 푸르다 못해 엷은 살 저민 구름송이 내 혼마저 앗아가는 그대의 눈빛처럼 영원히 숨쉬는 이 한 순간 풀잎 나부끼듯 나는 어이 전율하오리까 나는 어이 느껴우오리까 내마음 깊이 호수의 속살 젖게 하는 뉘 품이던가 한아름 그리움이기에 ⊙ 사랑법 사랑의 불길 이대로 잠재우는 것은 그 신비 남겨두기 위함이요 꺼지지 않은 재 가슴 어느 구석에 고이고이 묻어두기 위함이니 내게는 꿈인 너 산호와 같이 호젓한 바다 속 일렁이고, 아직 캐지 않은 조가비 진주 내 사랑은 그 신비의 생명체로 아롱아롱 가지벋어 자라고 먼 훗날에도 혼을 쏘는 화살되어 가슴에 꽂히어라 내 사랑! ⊙ 별 이야기 마른 가지 흐느끼고 먼 데 산 노을 비끼면 총총 인사하는 아련한 이름 늬 잃었던 보석도 내 잊었던 마음도 저토록 억조의 혼이 피는 밤 이 못견디는 밤을 별들은 시새위 눈 눈을 맑게 하고 눈을 이리 일깨워 놓고 속잎 트는 새벽녘 샘 속 숨어버리는 그리운 이름 ⊙ 우리의 포옹 우리의 포옹은 흰 빈둘기 나는 숲에, 하늘 지새오는 아침에서 하자 우리의 포옹은 고된 노동의 시간을 지나 아롱진 무지개 소롯이 잠기는 꿈결에서 하자 시시각각 조수 드설레는 가슴과 가슴 손과 손 그러잡고 한몸이 되자꾸나, 우리의 포옹은 꽃나비도 윤무 추는 온 겨레 환호소리 한마당 어우르는 피리소리 울려퍼질 때 릴라꽃 향기나는 그대에게 키스 퍼부어 두 심장이 하나로 고동치게 하자, 우리의 포옹은 ⊙ 차를 마시며 한 모금 마시다가 옆으로 비켜 놓는다 귀뚜리 이리 마음 어지럽힐 때 네 병 나의 아픔되어 밑 모르는 다갈색 심연 그 미소 깨치듯 속의 속 캐어가며 다독이는 가슴 언저리 별 하나 화살 박히면 다향도 찻잔 고였나 다시금 떫은 차 훌쩍인다 ⊙ 한밤의 노래 무시로 보고프면 별되어 어리는 그대의 눈동자 우러르오 울 없는 마음 이승을 때없이 오가고 머나먼 피안(彼岸)인데도 얼굴 마주본 듯 나직이 흥어리는 한밤의 노래 뒷산의 소쩍새 먹피 쏟아 울면 어느 넋 흔들어 깨울까 못견디게 그리우면 이글대는 불화살 밤하늘에 냉큼 쏘아 올리오 ⊙ 이브 오후 노 랑 나비 한 마리 진 홍 의 십·자·가 그 리 고 안개 속 날아 났 다 ⊙ 우리는 아무 말 없어도 우리는 아무 말 없어도 세월의 가장자리 봄 부르듯 그대 손짓하네 꽃보라로 타는 앞산 뒷산 부푼 꿈 넘실거리듯 그대 손짓하네 우리는 이미 하나의 태양, 우리는 이미 한마음 간직하기에 화끈 달아 오른 피여 가슴이여 한 바다 넘노는 저 해원(海原) 거센 물보라 달리니 우리는 아무 말 없어도 우리는 아무 말 없어도 ⊙ 어느 해의 연가 구름밭에 장미 피는 청춘의 무성한 그날에사 바다꿈의 파도소리 귀에 젖고 코스모스 하나 둘 얼굴 맞대는 한길 언저리 바람은 스산히 울어대는데 우리 이대로 어쩔 것인가 다만 하품의 시간 보낼 것인가 저 준령의 산맥들은 피젖은 역사 이어오고 시방 5천만의 아니 1억의 눈동자 하나만의 태양 우러러 우뚝 선 이팝나무 사이로 새어오는 아침 그 휘파람소리 구름밭에 장미 꽃봉오리 벙그는 새 천지 그날에사 가슴속 울림 먼 데 메아리지고 ⊙ 그 목소리 그대 눈동자 잊히지 않는 그 목소리 마음속 깊이 투시해 보는 그대 눈동자 그 목소리 어딘지 가늘게 떠는 그 목소리 그대 투명한 눈동자 세월은 무슨 앙금이기 닿으면 퉁길 듯 그 떨리는 목소리 호수의 꿈 지닌 물새 발자국 없는 그대 드맑은 얼굴 그 눈동자 싱그러운 허나 떨리는 듯 그 목소리 ⊙ 흰 목화송이 어느 시인이 사랑을 노래하지 않은 이 있을까 수정보다 더 맑은 보석별 우러르듯 시인들은 그의 다정한 모국어로 눈송이 같은 사랑을 노래하네 저 만큼 홀로 서 있는 흰 목화송이 그 여인에게 솜털보다 부푸는 언어로 나직이 속삭이는 밀어 시인들은 그의 타고난 가락으로 온갖 색색의 사랑노래 부르네 ⊙ 사랑을 말하라면 사랑을 말하라면 살자꿍 윙크를 해요, 새벽에 꽃봉오리 벙그듯이 사랑을 말하라면 여린 미소를 지어요, 저녁 종소리 자자든 호수와 같이 밤마다 사랑의 혼은 샘 속에 풍덩 고뇌의 두레박을 퍼 올리고 꽁꽁 바위에 묶이어도 프로메테우스 그 진한 피 혈관에 뛰어 사랑을 말하라면 가을날 알알이 맺히는 석류와 같이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 아침의 풍속 귀뚜리 우는 밤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어라 달뜨는 백야엔 희디흰 야상곡을 들려 주렴 시대의 아침 달리는 고뇌의 기수 하룻밤 꿈이 고달퍼 포옹으로 그대 안으면 산너머 태양 솟아 오르리니 아침의 풍속을 좇아 나는 이 어둠 몰아 가려오 더운 포옹으로 다시 열리는 새벽 달려 가려오 ⊙ 이 전율 그대의 흰 살결 솜털 같은 감촉 보들한 두 유방 아래 소슬히 닫힌 것 오, 이 전율 어이 하오리 노크도 없이 그대로 되돌아 설까 그대의 눈이 그대의 창이 흐려질까봐 커튼을 쳐놓고 어느 숲속의 목욕이 좋겠지 그대 몸에서는 사향 노루 같은 향내 부드러운 미소가 어리고 그대 목줄기 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네 ⊙ 아카시아 숲길 아카시아 숲길에 흰바람 귓결 스치고 지나면 머언 발치에 지는 잎, 잎… 우리 명상의 숲으로 가오 새새끼 지저귀는 숲길, 누리엔 온통 피묻은 가랑잎 구르고 노을 묻은 별들 소근대면 우리 꾀벗은 숲으로 가오 노루도 재를 넘던 비탈길, 몰래 밀어 속삭일 우리 텅빈 숲으로 가오 ⊙ 시편 하나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시편 하나 골라보구려 나는 로랑생의〈진정제〉, 그리고 아뽈리네르의〈미라보다리〉 그대는 이방 골의 〈뽀엠 아무르〉혹은 뵈르아랑의〈오후의 시간〉을 내세울 테지 그대가 바란다면 〈아리랑 행진곡〉불러도 좋아 〈화요일의 개가〉목청껏 불러도 좋아 그대가 원한다면 꿈트는 화산 불질러도 좋아 이 지상에서 덥고더운 시편 하나 골라보구려 ⊙ 우리들의 나라는 우리들의 나라는 사랑노래 부르는 피리새와 이른봄의 꽃송이 벙그는 그런 영토이게 하리니 우리들의 나라는 초록동산으로 아름드리 숲 이루고 가슴마다 넘치는 이야기 진달래 수놓는 그런 영토이게 하리니 어둔 밤 설레던 파도소리 무덤 같은 침묵을 깨고 화산이 터져나는 장한 울림… 우리들의 나라는 4월의 꿈도 무르익어 파랑새 날아 오르는 하늘, 그 부푸는 영토이게 하리니 다시 오르는 함성, 아리랑 행진도 흥겨우면 그대와 나 얼싸 춤을 추는 우리들의 새 영토는 ⊙ 사미인곡(思美人曲) 1 사랑은 받기보다 주는 것 그래, 괴로운 것 호롱불 꺼질 때 창의 별빛 화살되어 박히고 그 빛 숨결 속에 설레는 마음아 2 우주의 신비 감도는 샘 깊은 물 땅 괴어 징소리로 해 우러른 해바라기 고개틀면 갈대밭 흔드는 흰 손수건 기러기 나는 진노을 곱게 빗기는 그대 가느른 손이여 3 명주올 짜듯 섬세히 읊는 노래 저를 태워 사리(舍利) 내는 그토록 심지 곧은 꽃마음이 고와라 4 암사슴 같은 사향 마음자리 어려 아무 기척 없어도 한소식 첫눈이 나릴 때 진한 찻잔 기울여 쓸쓸함 달래고 나를 일깨워 뜻있는 하루 지새리 5 임아 처음 부르는 임아 눈빛 총총한 음성 익은 임아 범나비에게 꽃술을 따게 하리다 저 기러기에게 몇 자 띄우리다 머츰한 임아 6 왜 소식 아니 오나 왜 기별 한 번 없나 왠지 음신(音信) 못 띄우는 내 주변성이 임을 놓치지나 않을지 뒤채이는 생각 하루 이틀 일년 애 태우네 뜬눈으로 날 새우네 7 퉁퉁 부은 눈 마음이 모자라일까 망륙의 시력이라 안개 내린 신기루 가물가물 눈이 멀어 이 봄날 아련히 어려오는 안개꽃 그대 요술의 꽃인가 8 두견이 울음 뒤에 청산이 다가서다 그리움도 마냥 무지개로 피는 그대 떠난 자리 빈 가슴만 남아 청청한 대낮 하이얀 사연 띄우고 그리움도 이냥 무지개로 피는 청산이 다가서다 귀촉도 울음 뒤엔 ⊙ 얼굴 부질없이 내가 취하는 것은 그대 침묵하는 탓이오 부질없이 내가 소스라침은 초롱별 이우는 까닭이오 그 한 마디 멀어지면 내 웃음은 지고 먼 데 소식 안고 오는 꽃샘 온 뜰을 휘불린다 해도 내마음 다스리는 이 저 하늘과 향기나는 그 얼굴뿐이라오 ---------------------------------------------- 제3부 하나의 만남 ----------------------------------------------- -이 땅 이 하늘 아래 우리는 -첫눈이 오기 전에 -눈길 속의 황마차 -하나의 만남 -겨울의 실루엣 -진실의 씨앗 -내 가슴 안에 -마력의 님프 -사랑의 눈짓 -독한 술잔 -수정체 -노을길 -눈 꽃 -未知의 새 -호수 -길 -님의 노래 -첫눈처럼 -들장미 -코스모스 단장 -백자 1 -백자 2 -소라 속 노래로 ⊙ 이 땅 이 하늘 아래 우리는 이 땅 이 하늘 아래 우리는 얼굴 마주하지 않아도 향긋한 노래의 메아리 울립니다 그 싱그러운 아침해 뜨고, 달빛 젖어드는 창가에는 서울의 야상곡이 호젓합니다 속잎 트는 새 봄에는 복수초 꽃망울보다 더 밝고 환한 사랑의 메시지인가요 백목련 피는 하얀 날엔 그대 그리운 벤치의 빈 주소 하나 있습니다 이땅 이 하늘 아래 우리는 풀잎 이슬 무지개 아롱이듯 씨앗 한 톨 움트는 꿈을 꿉니다 ⊙ 첫눈이 오기 전에 그대 불러 보고픈 환한 아침이어라 그대와 숲속 거닐고픈 소슬한 아침이어라 코스모스 지는 흰 바람 휘불리는 오솔길 내 마음 거울같이 닦고 마른 숲 서성이면 가을이 두 어깨 스치어가네 나의 이브여, 그대 말없이 내 곁으로 오오 첫눈이 오기 전에 어서 내 곁으로! ⊙ 눈길 속의 황마차 눈빛처럼 밝은 언어여 그대 눈짓이여 이 우리들의 밤은 이 우리들의 낮은 구겨진 손수건 흔들어오고 그대 속삭임에 살얼음 녹는 마음과 마음 손과 손 더우잡는 눈길 속의 황마차 시대의 터널 끝없이 달려가고 피로도 심장으로도 새길 수 없는 것 꽃잎처럼 흩날리는 찬란함인가 눈짓 하나에 열리는 가슴이여 그대 진실이여 ⊙ 하나의 만남 하나의 만남은 이렇게도 비롯하는구나 별과 별이 제 자리 지키며 하나의 성좌를 이루듯 별과 달이 어둠 저 너머 금과 은으로 반짝이듯 하나의 만남은 아침 햇살과도 같이 눈부시고 샘처럼 고요히 넘쳐 흐르는 강물이어라 하나의 만남은 ⊙ 겨울의 실루엣 깨어나기 위하여 겨울새 둥지 찾듯 내 눈동자 그대 날개 위에 있네 그대 환영(幻影) 위에 돌아가 보는 하루 오롯이 손짓 하나 그대 다만 담장 너머 인동(忍冬) 덩굴로 하늘대고 시위 당기는 아폴로 그 달는 가슴으로 순백의 시구 어리는 나의 눈빛 빈 가지 눈꽃 위에 있네 ⊙ 진실의 씨앗 그대 눈짓으로, 나의 쉼없는 이야기 한밤내 누에실을 뽑게 해다오 그대 미소로는 달밤 어리는 한떨기 산유수꽃 보여줘요 거짓없는 나달의 시간들을 마련해 주시고 정열의 사랑 쓰게 해다오 그대 포옹으로 타는 가슴 식을 줄 모르는 불길 솟게 해줘요 한톨 진실의 씨앗이여 ⊙내 가슴 안에 그대 때로 맥주컵 비우고 그대 때로 환상의 시 흘리고 그대의 머리칼 어루만질 제 불꽃 이는 내 가슴 안에 그대는 묻히어 오네 ⊙ 마력의 님프 그대 허스키한 목소리 살뜰 답하고 저어하는 눈짓 허나 그대 나를 울리고 웃기고 그대 나를 울리는 마력의 님프인가 보오 ⊙ 사랑의 눈짓 내 사랑 꿈의 화신이여 그 눈빛에 그 하얀 가슴에 고운 시의 입김 쏟으려오 불붙는 생명의 화구에도 사랑의 눈짓 비치려오 맑은 샘 속 그 무구의 그 영원의 무지개 골짜기 샘물보다 더 청순한 인어의 향기에 젖으려오 나의 사랑 미(美)의 정령이여 ⊙ 독한 술잔 못잊어 그대 사랑하는데 그대 갖고파 몽땅 갖고 싶은데 이 술 한 잔 들고 대답해 다오 이 안주 드시골랑… 그래도 대답 않을 양이면 그대 곁에 다가가 손잔등 꼭 꼬집을 테야 그래도 대답 없을 양이면 독한 술 따르어 내 스스로 거푸거푸 취해 버리지 길바닥에 큰 대자 뻗고 절명해 가는 기류의 밤무덤 나를 잊고, 나를 버리고 쓰러져 버리지 ⊙ 수정체 사랑의 샘에서 솟는 눈물은 한 방울 수정체 그대 두고 그리움 향 맑게 차 오르면 한겨울 고드름보다도 다이아보다도 더 고운 수정체 사랑의 샘 마르도록 닳는 눈물은 한 방울 수정체 ⊙ 노을길 아카시아 샛길 지나 언덕을 굽어도는 산책길 어제도 가고 내일도 가야할 이 길 빈 파이프 물고 무념(無念)의 안개 뿜으면 어디선가 들릴 듯한 그 목소리 마음은 항아리되어 하늘 우러르는데 해 비낀 모롱이 메아리 없는 노을길 돌아선다 ⊙ 눈꽃 한 잎 두 잎 사나브로 눈꽃이 지네 빈 가지에 서린 내 가슴에 순결의 혼이… ⊙ 未知의 새 그대가 미지인 것처럼 숲속을 우는 새 한 마리 도시 뜻모를 곡조 더러 사랑이라 이름하고 더러 자연이라 이름하고 더러 환상이라고도 한다 그 그리메 늘인 오솔길 그대가 미지인 것처럼 내 마음 흔들리는 빛살 고운 이 어지러움 문득 신록의 하늘 쳐다본다 문득 잊었던 바다 그려본다 그대가 미지인 것처럼 이 봄 숲속을 우는 피리새 한 마리 나래 가벼운 날음이여 ⊙ 호수 그리워서 더욱 멀어지는 호수 눈뜨는 새벽 아지랭이 슬픔되어 흰 살 휘감아 오르면 아폴론의 꿈 앞에 살풋 몸을 떠는 호수 그대 숨결인 듯 살바람 물길 따라서 호젓이 그려보는 내 마음의 호수 하나 ⊙ 길 그 멀고도 험한 길 내가 그대보다 그대가 나보다 아득히 서 있는 길 길은 외길이면서 외길이 아닌 한낮 꽃초롱 피었다가 새벽별 우는살로 날아 이 빈 가슴 어리는 향기인 양 풀잎 돋는 무지개 아롱진 길 ⊙ 님의 노래 가장 낮은 목소리로 허나 씩씩하게, 우렁차게 우리는 사랑노래 부르자오 가장 아픈 목소리로 허나 순결하게, 뜨겁게 우리는 사랑노래 부르자오 땅벌에 쏘인 이 등걸 떨리는 고동아 골골이 모터의 음향 번지는 장한 날의 울림이여 태백의 줄기 뻗어내려 노령 넘나드는 흰 토끼야 산봉우리 서정의 기류 흐르면 샘속 비친 하늘 피리소리 은은히 우리는 또 사랑노래 부르자오 ⊙ 첫눈처럼 그대 첫눈처럼 왔다가 첫눈처럼 사라져 가네 그대 그리 더디 와서 그리도 쉬이 가네 이 겨울의 첫눈처럼 희디흰 천사처럼 ⊙ 들장미 내 마음을 아실 이 저 꽃을 보오 그 진홍 그 진실 못다한 말씀 이우는 해의 마음, 바다의 춤… 그대 두견에게 물어 보오 정녕 어느 울음이 더 맺힌가를… ⊙ 코스모스 단장 코스모스는 이제 불망(不忘)의 세월이 좋아 섬돌 밑에 피어 났느냐 코스모스는 먼 고향을 두고 꿈을 꾸느냐 귀뚜리 울다 간 밤 코스모스는 떠난 님 그리워 자나깨나 자나깨나 고개 기울고 홰치는 새벽이 오면 진주알 같은 사연 속 연분홍 눈물을 짓자 코스모스는 한길 열리는 가슴에 피어 온누리 수놓는 아침을 기다리자 ⊙ 소라 소라는 산호가 그리운지 먼 바다 소리에 귀를 세우고 소라는 인어 춤추는 달밤 은빛 파도에 꿈을 실어 뱅뱅 꼬인 연륜, 사랑도 진주도 감추고 속살 태운 소라껍데기 슬픈 날엔 바다의 피리를 분다 ⊙ 백자 1 어느 고운 살결이랴 가마솥 익은 불 다스려 저리 현신하는 님 하늬 속 꽃망울 웃는 새벽에도 영그는 말씀이기 이 빈 마음 채우는 샘 속 흰 물살이고자… ⊙ 백자 2 하늘보다 더 아련한 물살 그 몸둘레 비낀 곡선 위로 꿈 아롱진 안개 자락인가 아침 햇살 받은 비너스도 차마 네 이마는 닮지 못하리 천년을 샌다 해도 만년을 샌다 해도 고이 웃으며 돌아앉은 백자 항아리 ⊙ 소라 속 노래로 그대의 고운 미소가 어떤 꽃보다 단술보다 나를 이끈다 그대 향긋한 말 새겨듣지 못하는 미련이 허망의 꿈 되뇌이고 아무리 찻잔을 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마음이기 세 치 혀로는 차마 사랑을 말 못하는 나의 주변성이 이 낮과 밤을 오로지 소라 속 노래로 흥얼거린다 --------------------------------------------------- 제4부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나직이 고백해 다오 --------------------------------------------------- -한시절 꿈 -서정가 -기약없는 약속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나직이 고백해 다오 -둥근 해 -서울의 연인 -호수의 마음 -하지만 사랑은 -로망의 기수 -물망초 -새바람 -생각하는 사람 -저 하늘 파랑새처럼 -제주마를 몰고 -하늘빛 그날 -처음 본 순결 -하늬바람 -解土 머리 -협죽도 -님에게 -마른잎 -다시 窓 -音信 -밤의 속살에 ⊙ 한시절 꿈 등넌출 얽히설키 담장 기어오르고 풀잎 나부끼는 한시절 꽃밭의 금잔화도 시새워 색색웃음 지으며 그대와 나 꿈을 수놓은 아침과 저녁 한 송이 장미의 공간 꾸미자꾸나 속살 비비고 붉게 사랑 익으면 한시절 열매도 매달리는 그 나무의 보람 키우자꾸나 ⊙ 서정가 하 복사꽃 피기로서니 복사꽃 뚝뚝 지기로서니 나는 붉은 그 사랑을 몰라라 하 복사꽃 웃기로서니 복사꽃 찍찍 울기로서니 나는 미쁜 그 얼굴을 몰라라 삼월, 저 하늘ㅅ가 숨막히는 가슴 그뿐이더라 빈 항아리 마음 그뿐이더라 ⊙ 기약 없는 약속 이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갈대 꽃대궁과 내일을 이야기한다 시우쇠 달아 시위 쏜다던 가을수풀의 여인아, 찻잔 비우면 문명의 공허 괴고 맥주잔 기울이면 암흑의 별 스러지던 스카이라운지 나는 눌변이라서 채 울리지 못한 심현(心絃), 참새들의 아침 회의 엿듣고 온종일 네게 로망의 기사(騎士)처럼 달려가는 것이냐 ――생존이란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아닌 바다의 항해―― 겸허한 나이, 그 그림자 유리에 어리고 네 가슴에 심은 씨앗 한 톨 침묵의 어휘보다 시간의 패러독스여, 저마다 한 세대의 길을 가고 오늘 하잘것없는 서적과 문학을 살고 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또 기약없는 약속――내일을 이야기한다 ⊙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나직이 고백해 다오 그대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대신 핏방울 튀는 시 하나 선사하리 그대 두루미 목에 순금의 목걸이 대신 마음의 장미 한 송이 선사하리 그대 가는 허리엔 허리띠 대신 뭘 또 선사하리까 나는 빈 껍데기, 그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살짝이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살짝이 암시해 다오 나직이 고백해 다오 ⊙ 둥근 해 우리는 이미 맺어져 있네 우리는 이미 마음의 끈잇줄이 있네 화사한 봄날 그렇게 피어나듯 마음의 꽃봉오리 있네 아지랭이 피는 구름밭 꿈 싣고 오는 고운 장미 꽃구름이 있네 그날의 합창가도 있네 아침마다 길게 목을 뽑는 두루미 하늘 드높이 산맥도 뻗어내리는 선한 피 뛰놀고 있네 ⊙ 서울의 연인 사랑 한 번 실토해 본 적 없는 그대 물망초여 서울의 연인이여 나를 잊지 말아 다오 나를 기억해 다오 한겨울 창가 심장꽃 불태웠다오 화산같이 활활 달아 올랐다오 저 빛나는 샛별, 호수 속 눈망울 지면 언제까지 그렇게 있어다오, 마를 줄 모르는 옹달샘 마음에 어리는 일곱 빛 무지개 눈속에 가물거리는 그대 한 포기 물망초여 ⊙ 호수의 마음 호수에 잔물결 이는, 아침마다 누구의 숨결 인 가 호수는 고즈넉 미소짓고 온몸 풀어 하늘을 껴안을 듯 하네 호수는 마음 무늬에 자유를 사랑하는지 잔물결 옥인 듯 구르고 새벽 종소리 미끄러지듯 그 위를 흐르네 호수는 한밤에도 별을 줍는, 누구의 손길인가 ⊙ 하지만 사랑은 하지만 사랑은 별은 저리 밤하늘 연못을 반짝이네 호수는 또 고요한 물결에 잠기네 하지만 사랑은 눈에눈에 아니 비쳐 오네 내 가슴 부서진 이슬 갈대숲에 아니 맺혀 오네 나의 금간 마음 문풍지처럼 울리어 오네 ⊙ 로망의 기수 어디선가 강바람이 목을 휘감네 그대가 앳된 소녀라면 흰 말 타고 들길 달리는 로망의 기수 갈대밭 사이 하늘대는 꽃대궁… 이 아침은 왜 이리 환할까 흰 물살보다 드맑은 하늘이기 그대는 무슨 꿈 수놓을까 그대는 오솔길 걸을까 내 마음 무늬 어리는 그대의 미소여 ⊙ 물망초 내 이름을 잊지마 예쁜 새악씨, 하늘 열린 하늘 펄럭이는 깃발처럼 내가 해를 부르면 그대는 먹물로 칠한 하늘에 슬그미 찾아오는 은전 같은 달이여… 우리는 저 우랄타이 보석 줍는 나그네되어 그 먼 나라 떠나지 않으려오 호수에 잠긴 나의 심혼이 나를 지키고 서서 예쁜 새악씨, 그대 손짓하는 프로메테우스 나는 이 세상의 영광도 행복도 그 무엇도 잊은 지 오래라오, ――한 마디 꽃말이여 ⊙ 새 바람 욕정의 봄언덕 거닐 제 그대는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종다리 보리밭 이랑마다 솟는 희망, 삼월의 창이 열리고 자연의 침대로 돌아가 꿈을 뒹굴며 혈액순환 재촉하며 심호흡소리, 그대 마음 언저리 나의 눈 빛날 제 바다속 나풀거리는 산호림일까, 어느 바람 이는 옹달샘일까, 그 지심(地心) 흔들리는 듯 사랑노래 멎기 전 새 천지 수놓을 꽃바람·들바람·솔바람을… ⊙ 생각하는 사람 새벽 안개 헤치고 만상(萬象)이 아롱진 돌밭을 가오 병풍 휘두른 산이랑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천 층 낭떠러지 펼친 골짜기 ――아무 말 없어도 ――아무 표정 없어도 돌의 철학 가슴에 아로새기고 이 하루 그대의 꿈을 줍는 홍보석(紅寶石)――고뇌의 작업장에 가오 저 우듬지 초록벽 하나 빛날진저! ⊙ 저 하늘 파랑새처럼 문득 말을 잃었네 무슨 시를 쓸까 풀잎 나부끼는 거친 산굽이 저 하늘 파랑새처럼 날아갈 수 없을까 우리의 사랑 무늬 무슨 빛깔일까 신비에 싸인 그대 침묵 바다의 산호림일까 문득 말을 잃었네 무슨 시를 쓸까 ⊙ 제주마를 몰고 무구의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 오르는 햇덩이 안으면 그대는 꽃술 따는 꿀벌, 부지런한 나날이 이 꽃 저 꽃 시샘하듯 자연의 신비로운 대지의 조화로운 꽃밭 이루울 제 가을산은 저리 가슴 타는 새벽하늘 열려 오리니 높새바람 이는 구름 끝 제주마를 몰고 어느 먼 여행길에 오르지 않으려오 ⊙ 하늘빛 그날 어느 고즈넉한 아침 햇살 반짝여 오려는가 어느 불빛 타는 한낮 바다 일렁여 오려는가 숲속의 티티새도 하늘빛 그날을 지저귀는 폭포 휘굽는 흐름… 우리의 가슴은 하나에서 일천으로 뛰네, 저 그리움의 행렬 타는 넋 광야의 어둠 달리면 훤히 열려 올 산봉우리 인제 불기둥 이는 혼과 혼 불살라 오려는가 나의 이브여 ⊙ 처음 본 순결 어느 태초의 아침, 어언 말을 잃었네 벗이여, 연인이여 그 아름다운 환상을 어이하리 친구여, 애인이여 그 침묵의 시간을 어이하리 나는 눈감고 손길을 모아 至純의 언어를 더듬으네 시방 황야를 휘덮는 눈발… 처음 본 순결이기에 이 새벽이 밝으면 날개옷 춤추며 잊었던 나비들이 훨훨 내리네 ⊙ 하늬바람 아카시아 꽃잎 흰 바람에 나부끼면 그대 씨앗별 작은 우주이기에 멍울 같은 애틋한 사랑… 그대 아린 넋 4월의 수선화로 피어나 젊은 날의 꿈 실은 노래 하늬바람 오작교에 부는가 돌아오는 다리 넘어오는가 ⊙ 解土 머리 해토 머리 4월의 넋들이 수선화로 피는 노오란 아침을 아시나요? 그 산들바람을 아시나요? 자연의 푸른 침대가 산과 내와 호수 가득히 멀리 초원으로 내뻗은 햇살받이 아침을 아시나요? 풀잎에 무지개 아롱이는 어둠을 불살라 먹는 피닉스, 그 태양의 나래깃을 아시나요? 지금 바다는 고요히 자장가로 채워주고 있구려 미구에 비바람 일어 지구의 저편 열풍 휘불리면 꽃봉오리같이 피어날 보람날의 해와 달 구름 속 감초인 별들 새벽 안개 헤치고 열리는 새 봄 노오란 수선화로 멍울짓는 4월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대지의 푸른 설계를 아시나요? ⊙ 협죽도 협죽도 꽃 벙그는 아침 흰 산책길 떠나네 새벽닭 홰치고 이슬방울 풀숲 끼워 바람 스치는 길 오르네 산은 정적 속에 졸고 나는 무심코 생명의 빛깔들 보고 소스라치네 하양, 빨강, 파랑… 하늘빛도 보이네 마음 문도 열려오네 이 아침에 협죽도 사랑 무늬 펼치네 ⊙ 님에게 내 마음 읽어 주오 내 마음 재어 주오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오 나는 벌거숭이가 되었다오 그대 있기에 그대 눈빛 반짝이기에 나는 말 못하는 벙어리 오늘 첫눈이 내리오 저 하늘 강림의 나래 접어오오 내 혼을 일깨워 주오 내 넋을 앗아가 주오 ⊙ 마른잎 누군지 흰 손 하느적이면 이 가슴 낙엽이 묻네 불 꺼진 밤 풀 꽃인 양 별 스치우고 그대 눈동자 그 목소리 어느 여울목 사위어 갔나 내 마음 빈터 환영은 남아 찬비 뿌린 창가 텅빈 벤치 위 미련도 추억도 바래인 세월, 그래도 꿈속 잦아드는 허망 노래 수은등 불빛만 밤을 적시지 마로니에 마른 잎 바람에 불리면 저리 검은 그림자 흩날리네 ⊙ 다시 窓 나의 사랑을 그 창이라고 한다 어느 해 피는 꽃송이처럼 봉오리 맺혀 수없는 밤 몰려 가면 다시 열리는 빛 오, 아스라이 넘친 하얀 기류 속 머언 해협의 꿈이 어리고 푸른 하늘 나는 새에게 깃발을 흔들어댈 때 잿더미 태어나는 이름 불사조여 나의 회상을 그 창이라고 한다 ⊙ 音信 은행의 비밀 구좌처럼 우리는 익은 목소리로 말한다 통화 속에 묻어오는 것 통화 속에 묻어가는 것 그걸 느끼는 듯도 싶고 그걸 놓치는 듯도 싶다 이러구러 한 해가 가고 이러구러 한 해가 와도 허공의 헤엄처럼 우린 아슬아슬한 랑데부를 한다 ⊙ 밤의 속살에 이 밤에는 등을 켜게 하소서 아직은 못다 이룬 일과 못다 이룬 깨우침이 있기까지엔 누억년 묻혀 온 밤의 속살에 빨간 불 댕기고 마음 모두는 속심지 온누리 밝히면 이 밤에는 등을 끄게 하소서 ---------------------------------------------- 제5부 우리 한마음 되리 ---------------------------------------------- -별이 지는 연못 -눈 오는 날 -눈 1 -눈 2 -질투 -꽃밭 -황진이에게 -모과 -사랑이 미움되면 -12월 -裸婦 -거울 앞에서 -우리 한마음 되어 -이 밤에 -새벽길 -失神한 한낮 -북국의 창가 -우리들의 꿈 -핏빛 이야기 -손수건 -七夕 ⊙ 별이 지는 연못 나는 어둠을 그렇게 살리라, 그대 혼처럼 연못에 별들 내려와 앉은 밤 그대 넋처럼 어둠 몰고 밝히는 새벽길 그 길을 달려 가리라 굽이굽이 휘돌았지, 휘황한 별빛 머리에, 두 어깨에 이고 어느 미루나무 아래 꿈도 쉬어가던 이야기의 꽃이 석류알처럼 구슬 맺는 내 마음의 새별 피어오를 제 ――나의 사랑이여 ――나의 혼이여 언제까지 그 길 달려 가리라 나는 어둠을 그렇게 살리라 ⊙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 진한 커피 끓이며 빈 원고지 칸 메우면 봄의 입김인 듯 흰 종이에 선혈이 어린다 그 망설였던 사랑 그 허망했던 시간들 이러한 상흔마다에 눈나비 나래접어 오고 뜰은 태초되어 벙그는 은빛 꽃망울 재 너머 손짓하는 꽃샘 시심 영그는 우듬지 짹짹짹 참새들이 나른다 ⊙ 눈 1 가지 끝 내리는 하얀 나래 누구의 강림이기 그토록 밝아옴이 살아 숨쉬는 마음들아 새 아침을 열으리 ⊙ 눈 2 눈은 나비되어 내리누나 눈은 나비처럼 살아서 두 날개 폈다 접었다 하여 내 연인처럼 눈은 꿈의 부활처럼 이 티세상 내리누나 눈은 가을에 떠나간 마른 잎과도 같이 나의 창 어리우고 달빛 휘드린 빈 뜨락, 나목(裸木) 가지 벋은 울, 눈은 한소식 내리누나 ⊙ 질투 그대 사랑하기에 그대의 행동거지, 그대의 아리송한 곁눈질이 내 눈에는 파란 쌍심지 켜히네 그대 사랑하기에 그대의 시무룩한 표정, 그대의 침묵이 내 가슴엔 장미가시로 박혀 오네 누가 사랑을 달디달다고… 사랑이란 천길 벼랑보다 더 깊은 심연 사랑이란 파란 질투 때문에 사지를 떠는 어질한 마취제 같은 것인가 보오 ⊙ 꽃밭 꽃밭에 달빛 스미면 이슬 젖은 초롱과 초롱 가슴과 가슴을 비비며 남몰래 수놓는 사연 연못 진 별에게 고개 떨굽니다 꽃밭에 달빛 스미면 부끄러운 살결과 살결 마음과 마음을 열으며 아프게 여무는 씨앗톨 새벽바람 창가에 나랠 폅니다 ⊙ 황진이에게 동방의 사포여, 그대 집시이자 기녀이기 즐겨 시육의 까마귀에게 뜯기었나 정다운 사포요, 그대 林悌를 아는가 모르는가 후미진 골 청초히 묻힌 혼… 지금도 이 가슴 울리네, 서리서리 맺힌 가락 한밤을 뜯어예는 거문고 줄 마디마디 비곡이 어스름 달빛 부르네, 이밤 삼경을 아아라이 지새우네 ⊙ 모과 푸르댕댕한 피부는 가을이 영그는 풋과일 어느 오솔길 타고 와 서울에 첫선 보인 그 투박한 몸통 시월의 하늘가 서 보면 내 마음에도 응어린 모과 한 덩이 한여름 불붙는 사랑의 전설은 없어도 모과, 그 떫떫한 육즙(肉汁) 고이 담긴 신맛 익어도 결코 빠개지지 않는 결실의 뜻이고자 과묵한 시인되어 그대로 차돌 닮은 놀묘한 곡선이 한결 탐스럽구려 ⊙ 사랑이 미움되면 사랑이 미움되면 낮도 밤되어 시드오 무지개 핀 산너머 꽃도 멍울져 아리고 그대의 꽃편지 피리새 우는 사연인가 사랑이 미움되면 이 봄 넋을 앗아가오 ⊙ 12월 대지에 부푼 희망을 뿌리박고 사는 것은 좋다! 12월 12월에 서서 독한 술잔과 같은 어지러움 창공에 푸른 미래를 씨뿌리고 사는 것은 좋다 12월, 12월에 서서 진한 칼슘과 같은 화끈거림 어느 해이던가, 먹물진 밤하늘 새별이 탄다! 12월 12월에 서서 첫사랑과 같은 안타까움 그렇듯 갈망하는 님이여 한길 찾는 눈길이여 ⊙ 裸婦 이브 데이의 裸婦 앞에 서면 나는 그만 얼어붙는다 그 신비의 허리깨 그 몽실한 유방의 곡선 나욧한 고돗이 감탕처럼 달고 원시의 공간에 쏟아지는 소나타! 분수처럼 흰 살결이 눈부시어 설핏 얼굴 묻은 裸像 앞에 서면 나는 그만 말을 잃는다 ⊙ 거울 앞에서 그대는 내 마음 닦는 순백의 거울 티 없는 물살 고즈너기 일렁여 올 제 고혹의 머리칼, 아니 샛별 반짝이지 않아도 내 마음 깃들이는 미소 거울 앞에 서면 호수의 물새되어 메아리로 울리는 노래 그대는 내 마음 채우는 수정거울 ⊙ 우리 한마음 되어 나의 마음 속에 그대 마음 포개면 우리 티끌 없는 한마음 되리 그러다 새되어 노래하고 이내 꽃으로도 벙글다가 새 아침 환한 웃음으로 눈뜨는 샘 그 샘 고요로움에 넋을 빠뜨려도 좋으리니 별과 별이 하나의 눈짓으로 이슬 젖은 우리 못잊는 한마음 되리 ⊙ 이 밤에 그대가 신월(新月)에서 사랑의 초서(草書) 쓸 제 그대가 황혼에서 사랑의 밀서(密書) 쓸 제 대지는 잠들어 눕는구려 밀레의 만종 은은한 들녘… 누군가 가슴에 손을 얹고 누군가 머리에 별을 이고 입을 다무네 우리는 이 기나긴 밤 심연에 혼 빠뜨리고 어둠의 사닥다리 오르내리네 나의 이브여, 이 밤이 너무 길지 않아요? ⊙ 새벽길 그대 장미 한 송이 꺾어들고 새벽길 나설 제 풀섶의 자벌레도 환희어린 곡조 읊으리니 우리의 새 터전에 불붙는 연가 신록의 가로수 길 그대 장미 한아름 안아올 제 풀잎에 아롱진 무지개도 황홀한 꿈에 도취하리니 그대 정열의 꽃송이 피어올 제 시인공화국에 물결치는 노래 오, 자유의 뮤즈여 오, 행복의 초대장이여 그대 장미 선혈로 물들여 올 제 저 구름 속 파동치는 새 아침――새 처녀지가 열려 오리니 ⊙ 失神한 한낮 포도잎 칭칭 감기는 계절이 오면 <뽀엠 아무르〉를 노래한 이방 골, 끄레르 골의 사랑노래 펴들고 숲으로 가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성 그림자 음산한데, 앙상한 능금나무 속에서 노래노래 부르옵네 사랑의 노래 무서움도 타지않고 꾀꼬리 홀로 앉아서'(*주1) '그대 잠들어 눈에 광채가 차츰 없어지면 나는 두려웁고 근심스러워! 그대 나의 위에서 잠깨지 않을 때 세계의 종말이 나는 무서워' (*주2) 우리 또한 노래 부르옵네 밀월의 속삭임 노래 부르옵네 장미의 속웃음 원시림 속 고요의 샘 알몸 담그고 실신한 한낮 사계화(四季花) 피는 초원에 나를 이끌어 주심이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1) POEMES D'AMOUR의 제1부―끄레르에게 13의 제1연 2) POEMES D'AMOUR의 제2부―이방에게 3의 제1연 ⊙ 북국의 창가 잎이 지네, 잎이 지며는 인적 드문 비탈길을 단둘이 내려서지 않으려오 이제 훌훌 벗어버린 나무들 한겨울 맞설 시월도 기운 때 피 뿌린 듯 낙엽 묻은 골 그 나무 둘레 서성이지 않으려오 수레 도는 밤의 적막, 헤어질 시간이 이르렀구려 11월 보석 반짝이는 밤 우리 북국의 창에서 뭔가 나직이 속삭이지 않으려오 ⊙ 우리들의 꿈 콘크리트 바닥 암괴같이 굳은 내 마음도 그대 앞에 서면 어느덧 해면(海綿)처럼 녹아 물결 춤추는 우뭇가사리 대양의 한량없는 파도를 달리는구려 그때 어느 바닷가 소라는 헤시시 헤으름을 웃고 해당화 수놓은 백사장 천년 모래성을 쌓아 하늘 눈뜬 아침마다 도수체조 흥겹게 푸른 숨결 몰아쉬는 가쁜 심호흡소리 이렇게 그대와 나 한길 줄달음치는 수평선 너머 우리들의 꿈이 널실거릴 때 ⊙ 핏빛 이야기 나뭇잎 사위는 계절이 오면 저 한겨울 내달리지 않으려오 흰 눈송이 피는 마른 나뭇가지, 겨울은 차라리 따스하거니 우리의 꿈 묻는 대지 4월의 핏빛 이야기도 서린 다시 오는 봄, 두견새 피울음 우는 산불 밝히고 진달래도 피리니 나의 이브여, 시방 으능잎 지는 저 뜰로, 숲으로 내달리지 않으려오 ⊙ 손수건 어느 희멀건 새벽에 오려는가 어느 울음 울듯 저녁에 이 대지 찾아 오려는가 기적도 사라진 역 모롱이 손수건 흔들면 나의 사랑이여, 순결의 눈빛이여 내리려므나 화톳불 타는 들녘 외로운 사람에게 악수 청하는 다정한 인사여 어느 심야에 사뿐히 오려는가 어느 폭풍 휘몰아친 뒤 정적 한 순간을 재우려는가 ⊙ 七夕 까막 까치 외다리 놓곤 떨군 눈물 단비단비 내리네 동녘에 견우별이 떴네 서녘에 직녀별이 요요욧 그 모습 드러냈네 하도한 사연을 은하 흐르는 저 광년 초승달은 시새워 싸리문 넘고 메마른 사바(娑婆) 적시는 칠석비 초이렛날 초저녁 오작교 놓곤 쏟은 눈물 이승에 가득 차오네